장기 저금리 정책이 소비 회복보다 대출 과열과 부동산 버블 촉발
한은, 가계부채 리스크 수차례 인지했지만, 실질 조치엔 실패
정부의 경기 부양 압박 속 통화정책의 자율성과 책임 훼손
변동금리 70% 시대, 금리 급등의 고통이 고스란히 가계로 이전
금융안정이 우선…부채 관리 없는 통화정책은 무조건 실패
[아시아에이=송기철 기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행은 장기 저금리 정책을 통해 경기 부양의 버팀목 역할을 자처해왔다. 그러나 그 저금리의 ‘그늘’이 이제 한국 경제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가계부채 2000조 원 시대, 그 배후에는 한은의 완화적 통화정책이 만들어낸 ‘빚의 구조적 확산’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거세다.
한은은 2014년부터 2021년까지 기준금리를 1% 안팎의 초저금리 수준으로 유지했다. 당시 명분은 경기 둔화와 수출 부진, 저물가 대응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고 가계대출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2016년 이후 5년 동안 가계신용은 400조 원 이상 늘어났으며, 부동산을 담보로 한 대출이 전체의 70%를 넘어섰다. ‘저금리 = 자산상승’이라는 신호가 시장을 왜곡시키고, 국민은 빚을 통해 집을 사는 구조로 내몰렸다.
문제는 한은이 이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017년 이후 한은은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수차례 “가계부채가 경제 시스템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실제 금리인상이나 대출총량 규제와 같은 후속 조치는 지연됐다. 2021년 8월이 돼서야 한은은 기준금리를 1.25%로 인상했지만, 이미 시장은 ‘빚의 중독’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한은이 경고만 하고 행동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한국은행의 이 같은 소극적 대응은 “정책 독립성보다 정부와 시장의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당시 정부는 부동산 경기 부양과 소비 촉진을 위해 ‘완화 기조 유지’를 요구했고, 한은은 실질적 조치 없이 “균형 있는 정책”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일관했다. 결과적으로 한은은 정부 정책의 방조자이자, 부채 확대의 조용한 동조자가 됐다.
통화정책이 실물경제보다 금융자산을 자극했다는 점도 문제다. 저금리는 소비를 늘리기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의 유동성 이동을 초래했다. 이 시기 개인신용대출은 2년 새 200조 원 증가했고, 다중채무자 비율은 20%를 넘어섰다. 한은의 저금리 기조가 부동산 가격과 가계부채를 동시에 폭발시킨 셈이다.
2022년 이후 금리가 급격히 오르자, 그 후유증은 가계로 직격했다.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70%를 넘는 상황에서, 기준금리 1%p 상승은 연간 수조 원의 추가 이자 부담으로 이어졌다. 한은이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를 인상할 때마다, 수백만 가계의 생계는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은 “정책금리의 목적은 물가와 경기 안정이며, 가계부채 관리는 정부 소관”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하지만 가계부채는 이미 통화정책의 직접적인 부산물이자, 중앙은행 신뢰의 시험대가 된 상태다. IMF 보고서조차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는 통화정책의 완화적 스탠스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한은이 통화정책의 독립성 뒤에 숨지 말고, 금융안정책의 책임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리정책과 거시건전성 정책을 분리한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부채가 늘어난 나라가 됐다. 통화정책이 경기 부양의 수단이 아니라, 부채 중독을 키운 도구로 작동했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한은은 지금이라도 ‘이자율 조정’이라는 전통적 도구를 넘어, 금융기관 대출총량, 변동금리 비중, 자산 편중 구조를 통합 관리해야 한다. 가계부채가 GDP의 100%에 가까운 지금, 더 이상 “지켜보겠다”는 말로는 금융 불균형을 막을 수 없다.
‘저금리의 덫’은 결국 국민의 삶을 희생시켜 경제 하락을 막는 도구였다. 중앙은행의 책무가 국민의 금융안정이라면, 이제 한은은 경기 부양보다 부채 구조 개혁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부채를 키운 정책은 결국 부채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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