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을 ‘재기의 제도’로 만든 미국의 합리적 선택
신용등급과 ‘세컨드 찬스’가 만든 사회적 안전망 눈길
상담기관 중심의 채무조정, 이자 인하와 상환 유연성 확보
빚을 넘어 삶을 회복하는 문화, 한국에 주는 시사점

[아시아에이=송기철 기자] 가계부채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과제지만, 미국은 이를 ‘재기의 제도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왔다. 채무를 지더라도 사회적 낙인이 영구적으로 남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채무자를 다시 경제 활동으로 복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단순히 연체율 관리나 금융 규율 강화에 치중해온 한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파산 제도는 Chapter 7(청산파산)과 Chapter 13(개인회생)으로 대표된다. Chapter 7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을 매각해 채권자에게 분배한 뒤 남은 빚을 면책해 주는 방식이다. 절차가 보통 6개월 안에 마무리돼 신속한 재기가 가능하다. 반면 Chapter 13은 일정한 소득이 있는 채무자가 법원 감독 아래 3~5년간 상환 계획을 성실히 이행하면 남은 채무를 감면받을 수 있다. 이는 “빚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과 “갚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구분해 맞춤형 회생 경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자료정리=아시아에이
자료정리=아시아에이

실제로 미국 연방 법원 통계에 따르면, 매년 수십만 건의 개인 파산 사건이 처리되며, 그 중 상당수가 Chapter 7을 통한 빠른 면책 절차를 선택한다. 이러한 구조는 채무자의 재기를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로 복귀시키는 통로로 기능한다.

미국은 파산이 최후의 수단이 되도록 다양한 채무조정 제도를 운영한다. Debt Management Program(채무관리 프로그램)에서는 비영리 신용상담기관이 채무자의 전체 채무를 조정해, 금리 인하·상환 기간 연장·벌금 감면 등을 이끌어낸다. 또 Debt Settlement(채무 조정 협상) 제도를 통해 일정 금액을 일시 상환하면 나머지를 면제해주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정부와 민간의 협력이다. 채무자는 신용상담기관을 통해 합법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밟을 수 있으며, 금융회사는 장기 연체와 파산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다. 결국 “모두가 손해를 최소화하는 구조”가 작동하는 셈이다.

미국에서 신용등급은 주택 임대, 보험료 산정, 심지어 취업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사회적 지표다. 따라서 신용 회복 절차 역시 체계적으로 마련돼 있다. 파산 기록은 7~10년 동안 남지만, 그 사이 소액 신용카드 사용, 공과금 성실 납부, 보증금 납입 이력 등이 신용점수를 회복시키는 데 활용된다. 한 금융학 교수는 “미국에서는 신용이 무너져도 다시 쌓을 수 있다는 세컨드 찬스 문화가 존재한다”며 “이는 부채가 사회적 낙인이 되지 않고, 경제 활동 복귀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뉴욕에서 직장을 잃은 30대 여성 J씨는 의료비와 학자금 대출로 인해 약 6만 달러의 빚을 떠안게 됐다. 소득이 불안정해 파산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Chapter 13을 선택하도록 권고했고, 그녀는 월 소득 일부를 5년간 상환하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현재 3년째 계획을 성실히 이행 중인 그녀는 “빚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 제도는 개인의 경제적 실패를 종신형으로 규정하지 않고, 재도전의 기회를 보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역시 개인회생·파산 제도가 존재하지만, 절차의 문턱이 높고 사회적 낙인이 오래 남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신용등급 회복이 느려, 채무자가 다시 경제활동에 참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면 미국은 채무자 재활을 제도적으로 설계해, 소비 회복과 사회 생산성 유지라는 거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직면한 가계부채 위기 상황에서, 단순히 대출을 줄이고 규제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미국처럼 채무자의 사회 복귀와 신용 회복 경로를 체계화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아시아에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