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썸 사태, ‘제도·감독·책임’ 삼중 공백 드러낸 경고
규제가 아닌 설계..일관된 제도화가 신뢰 회복의 열쇠
단일 감독체계·공시 의무·투자자 등급제로 기본 틀 확립
국제 협력·금융 통합으로 글로벌 경쟁력 회복해야
[아시아에이=최지연 기자] 빗썸 렌딩플러스 사태는 한국 가상자산 시장의 취약한 기초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단순히 한 거래소의 영업 리스크가 아니라, 제도와 감독, 투자자 보호, 국제 정합성까지 모두 미비한 ‘총체적 시스템 결함’이 노출된 사건이었다. 거래소는 은행처럼 자금을 대여하고 청산했지만, 금융기관처럼 규제를 받지 않았다. 투자자는 보호받지 못했고, 금융당국은 명확한 법적 권한 없이 사후 경고에 머물렀다. 이번 사태는 한국이 가상자산을 ‘투기’가 아닌 ‘산업’으로 다뤄야 할 시점이 도래했음을 알렸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핵심은 “규제가 아닌 설계”, 즉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제도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시장의 신뢰는 단속의 강도가 아니라, 규칙의 명확성과 책임의 분배에서 나온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 사건 대응이 아닌 중장기적 단계별 개혁 로드맵이 필요하다.
먼저, 기초 법·제도 정비 단계(1단계) 에서는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현재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은 이용자 자산 분리, 해킹 배상 등 최소한의 장치에 그치고 있으며, 렌딩·파생상품·스테이블코인·토큰증권(STO)에 대한 구체적 기준은 부재하다. 정부는 2025년 발의 예정인 「디지털 금융 종합법」에 가상자산을 포함해, 금융자산의 일종으로 인정하면서 감독 범위를 명문화해야 한다. 또한 금융위원회·금감원·과기정통부 등으로 분산된 감독 권한을 단일 감독체계로 일원화해야 한다.
이러한 법적 정의가 정립돼야 이후 단계의 정책 설계가 가능하다. 일본이 2017년 코인체크 해킹 사건 이후 금융청(FSA)을 중심으로 단일 감독 체계를 구축한 것이 좋은 선례다.
둘째, 투자자 보호 및 시장 감시 체계 구축 단계(2단계) 에서는 거래소의 내부통제, 정보공시, 투자자 보호 장치를 제도화해야 한다. 모든 거래소는 일정 주기로 보유 자산 구조, 담보비율, 청산 내역, 내부 리스크 평가 결과를 공시해야 하며, 이를 상시 점검할 ‘가상자산감독원(가칭)’ 설치가 필요하다.
또한 투자자 등급제, 적합성 평가, 레버리지 한도제 등 제도권 금융에서 이미 시행 중인 절차를 가상자산 시장에도 적용해야 한다. 개인 투자자의 과도한 빚투와 고위험 상품 접근을 제한하고, 청년층·초보 투자자 보호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예컨대 소득 수준과 투자 경험에 따라 차등화된 한도 설정이 이뤄지면, 시장의 과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셋째, 국제 정합성 및 협력 체계 강화 단계(3단계) 가 뒤따라야 한다. FATF(자금세탁방지기구)의 ‘트래블룰’ 의무화, BIS의 스테이블코인 회계기준, IOSCO의 거래소 투명성 지침 등 국제 기준을 국내 제도로 신속히 반영해야 한다. 한국이 이 기준을 도입하지 않으면, 글로벌 금융기관의 ‘화이트리스트(신뢰 거래소 목록)’에서 제외될 수 있다. 따라서 해외 감독기관과 정보 공유, 제재 공조, 기술 표준 협력 등을 위한 국제 공동 감독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2025년 금융위가 추진 중인 GFIN(글로벌 핀테크 혁신 네트워크) 가입은 단순 협력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인 데이터 교류·공동제재 체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넷째, 금융권 통합 및 디지털 자산 인프라 구축 단계(4단계) 에서는 가상자산을 제도권 금융 안으로 편입해야 한다. 일정 기준을 충족한 거래소에는 금융기관형 면허를 부여하고, 은행·증권사·핀테크 기업이 공동 참여하는 디지털 금융 허브 플랫폼을 설립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가상자산 거래, 결제, 커스터디(수탁), 토큰화된 예금 서비스 등이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운영될 수 있다.
이 구조는 단순한 혁신이 아니라, 한국 금융 인프라의 디지털 전환을 촉진한다. 싱가포르의 MAS는 이미 은행권이 참여하는 블록체인 기반 결제 프로젝트(Ubin)를 상용화했으며, 일본 역시 MUFG와 미즈호가 민간 디지털 결제망을 중앙은행 시스템과 연계하고 있다. 한국이 이 흐름을 따르지 못한다면, 디지털 자본시장의 국제 경쟁에서 고립될 위험이 크다.
다섯째, 시장 신뢰 복원 및 지속가능한 생태계 구축 단계(5단계) 가 개혁의 종착점이다. 제도는 곧 시장 문화로 이어져야 한다. 거래소는 자율적 내부통제를 강화하고, 투자자 보호 책임을 스스로 이행해야 한다. 감독당국은 일관된 정책 신호를 유지해 기업과 투자자가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의사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언론과 전문가들은 ‘투기 조장형 보도’에서 벗어나, 리스크 교육과 정보 제공 중심의 건전한 투자 문화 확산에 기여해야 한다.
결국 시장의 신뢰는 제도의 강도에서가 아니라 일관성(consistency) 과 예측 가능성(predictability) 에서 회복된다.
이 다섯 단계가 병행된다면, 한국 가상자산 시장은 불신과 과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안정적 성장 궤도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단순한 금융정책이 아니라, 미래 디지털 경제의 기본 설계다. 세계 주요국이 이미 ‘토큰화 금융(Tokenized Finance)’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한국이 뒤처진다면 자본시장 전체의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
신뢰 회복은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규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가상자산 시장을 장기적 성장의 기반으로 전환하려면 정부·거래소·금융기관·기술기업이 공동으로 거버넌스를 설계해야 한다. 빗썸 사태는 경고이자 기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도와 산업이 함께 진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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