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대여·레버리지, 법적 기준 없는 제도 공백 드러나
과거 신용융자·FX 마진거래 남용과 닮은 구조적 위험
미국·일본·싱가포르 대비 뒤처진 한국의 규제 현실
청년층 ‘빚투’ 확산, 가계부채 악화와 사회적 파장 불가피
제도권 금융 수준 규제·투자자 보호 장치 시급히 마련돼야
[아시아에이=최지연 기자] 빗썸의 ‘렌딩플러스(Lending Plus)’ 사태는 단순한 신사업 논란이 아니라 한국 가상자산 시장 전반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투자자들은 단기 수익을 위해 고위험 레버리지를 감수했고, 거래소는 거래량 확대와 수수료 수익 극대화에 매달렸으며, 금융당국은 강제력이 없는 행정지도로 뒤늦게 대응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수천 명의 투자자가 실제로 강제 청산을 당하며 피해를 입었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구제할 제도적 장치는 거의 없었다. 이번 사태는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고 시장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제도화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보여준다.
현행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은 거래소 운영, 상장 심사, 예치금 보호 등 기본적인 규정만 담고 있다. 그러나 대여·레버리지 서비스와 같이 투자 위험이 큰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준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거래소들은 사실상 자율적으로 상품을 설계·판매할 수 있었고, 피해가 발생해도 법적으로 다툴 근거가 부족해 투자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금융당국이 지난 9월 5일 업계 협회 DAXA를 통해 자율규제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레버리지 한도 제한, 대여 자산 범위, 수수료 상한, 위험 고지 의무 등을 담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권고에 불과하다. 법적 구속력이 부족해 거래소가 이를 형식적으로만 준수해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과거 한국 증시의 신용융자 남용을 떠올린다. 2000년대 초반 코스닥 시장에서는 신용거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개인 투자자들의 손실이 커졌고, 결국 금융당국이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FX 마진거래 역시 고레버리지 구조로 피해가 속출하면서 국내에서는 사실상 제한적인 상품으로 남게 됐다.
빗썸 렌딩플러스 사태는 이러한 과거의 교훈이 가상자산 시장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을 담보로 한 대여가 대규모 매도 물량을 촉발해 시세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은 개인 차원의 손실을 넘어 전체 시장 안정성까지 위협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해외 사례를 보면 한국의 대응이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 분명해진다. 미국에서는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증권성 여부를 따져 가상자산 렌딩 및 이자 상품을 강력히 규제해 왔다. 등록 요건을 지키지 않은 거래소에는 수억 달러대 벌금을 부과하고, 불법 영업을 중단시킨 사례도 적지 않다.
일본은 2023년 자금결제법 개정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법적 제도권에 편입시켰고, 거래소가 제공할 수 있는 대여 상품의 구조와 레버리지 한도를 명확히 규정했다. 싱가포르는 금융관리청(MAS)을 중심으로 투자자 적합성 평가, 리스크 고지 의무, 이용자 자산 분리 보관 등을 강화하며 제도권 금융과 유사한 수준의 규제를 도입했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은 자율규제라는 임시방편에만 의존하고 있어, 글로벌 스탠다드와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사태는 ‘코인판 빚투’의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20~30대 청년층 투자자들이 단기 차익을 노리고 고위험 상품에 뛰어들었고, 일부는 강제 청산을 당한 뒤 고금리 대출을 추가로 떠안으면서 신용등급 하락이라는 이중의 피해를 겪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투자 실패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이어진다. 가계부채가 이미 2천조 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청년층의 과도한 차입은 장기적으로 소비 위축, 자산 격차 심화,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 참여자들의 ‘빚투’ 행태가 방치될 경우, 주식시장에 이어 가상자산 시장에서도 동일한 악순환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제도화의 방향은 명확하다. 첫째, 가상자산 대여 및 레버리지 서비스에 대한 법적 정의와 허용 범위를 명문화해야 한다. 둘째, 투자자 보호 장치를 제도권 금융 수준으로 끌어올려 사전 교육, 적합성 평가, 투자 한도 설정 등을 의무화해야 한다. 셋째, 거래소가 위험 관리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내부통제 강화와 자산 분리 보관 의무를 확실히 규정해야 한다. 넷째, 감독당국은 권고 수준의 행정지도를 넘어 제재와 벌금, 영업정지 같은 실질적 수단을 갖출 필요가 있다.
결국 빗썸 렌딩플러스 논란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 가상자산 시장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제도적 과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신호탄이다. 개인 투자자의 단기 투기 성향, 거래소의 수익 중심 행보, 금융당국의 미온적 대응이 맞물려 나타난 피해는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가상자산 시장을 제도권 금융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개혁이 시급하다. 투자자 보호가 선언적 구호가 아닌 실질적 제도로 뒷받침될 때, 비로소 시장의 신뢰와 건전성이 확보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