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은 생존의 수단”…원금 상환은 먼 이야기
5년 간 소득 0.8%↑, 이자 30%↑…나락 가는 가계의 삶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빚…다중 채무자 500만 시대
전문가들 “이자 지원, 탕감 보다 대출 규제 강화가 먼저”
[아시아에이=송기철 기자] 서울 강서구의 직장인 김모(34) 씨는 2021년 4억 원대의 소형 아파트를 구매하면서 생애 첫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그는 당시 소위 ‘영끌’로 2.4% 변동금리 조건의 주담대 2억8000만 원을 끌어냈지만, 2023년 기준금리 인상 여파로 현재 적용금리는 5.1% 수준까지 높아졌다. 매달 고정비처럼 빠져나가는 이자만 110만 원. 김 씨는 “이자만 내고 나면 월급은 텅 빈다. 보험도 해지했고, 저축도 못 하고 있다”며 “지금 상황이 몇 년만 더 이어지면 차라리 전세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출을 갚자니 집을 팔아도 남는 게 없고, 이사를 가자니 전세금도 빠듯하다. 그는 그저 ‘버티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처럼 이자만 간신히 갚는 ‘생존형 대출 가계’가 대한민국 전역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변동금리 대출의 높은 비중, 실질소득의 정체, 생활비 상승, 자산 가치 하락 등 여러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수많은 가계가 더는 원금은 꿈도 꾸지 못하는 구조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2025년 1분기 기준 전체 가계대출 중 변동금리 대출 비중은 72.3%에 이른다. 이는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구조는 금리 인상기마다 가계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구조이며, 실제로 2022~2023년 금리가 빠르게 상승하던 시기에, 한국의 가계는 이자 지출이 급증해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한국은행의 ‘가계부채 취약성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으로 전체 가계의 27.8%가 월 소득의 40% 이상을 이자 상환에 쓰고 있으며, 8.4%는 50% 이상을 이자에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상적으로 ‘고위험 부채가구’로 분류되는 기준을 훌쩍 넘는 수준이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5년간 실질 가처분소득은 평균 연 0.8%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평균 대출 이자 부담은 연평균 5~7%씩 증가해 가계의 실질 구매력은 해마다 뒷걸음질쳤다. 생활비와 고정비가 오른 상태에서 실질소득이 정체되고, 이자까지 뛰면서 가계의 소비 여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자산이 부족한 청년층과 중저소득층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금융시장에서의 신용등급 하락까지 이어져 ‘부채 악순환’ 구조로 고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서울 성북구에서 음식점을 운영 중인 자영업자 박모(46) 씨는 코로나19 당시 정부의 소상공인 정책자금을 통해 5000만 원을 대출받았다. 당시 저리로 빌렸지만 3년 거치 이후 본격적인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자 부담이 커졌다. 게다가 인건비와 재료비가 오르면서 그는 추가로 카드론과 현금서비스까지 이용하게 됐다. “매달 이자만 60만 원, 원금은 손도 못 댑니다. 매출이 줄어든 건 고사하고, 장사도 요즘은 불안정해서 월세 내기도 빠듯해요.” 박 씨는 더 이상 신규 대출도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이처럼 생존을 위해 빚을 내고,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내는 상황은 더 이상 일부의 일이 아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으로 전체 차주 중 3건 이상의 대출을 보유한 ‘다중채무자’는 약 505만 명으로, 전체 차주의 21.7%에 달한다. 특히 2금융권과 대부업으로 옮겨가는 대출 경로가 늘면서, 평균 이자율은 15~20%에 달하고 있으며, 연체율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2025년 1분기 기준 2금융권 연체율은 1.32%로 2년 내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금리 대출 구조는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구조를 단순히 금리 문제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금융연구원 관계쟈는 “한국의 가계부채 구조는 소득 정체, 자산 편중, 과잉 대출 관행이 결합된 다층적 문제”라며 “이자만 갚는 구조는 소득이 낮거나 자산이 부족한 계층일수록 더 쉽게 빠지고, 금융이 아닌 생계 문제로 전이된다”고 지적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6월 국회 발언에서 “가계의 부채 구조가 경제성장보다 앞서가고 있다”며 “취약 계층에 대한 보호와 함께, 금융기관의 대출 심사 기준 강화, 고정금리 대출 유도 등 체계적인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정부는 2025년 들어 소득이 낮은 청년층과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안심전환대출 확대, 금리 인하 유도, 채무조정 프로그램 강화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자 부담을 줄이는 단기 처방만으로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대출 구조가 유지될 경우, 저소득층과 청년층의 부채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는 근본적인 대출 수요 억제와 함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강화, 다주택자 및 고액 신용대출자에 대한 추가 규제 등 보다 엄격한 대출 제한 조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권은 고정금리 상품 확대와 동시에, 장기적인 소득 기반 채무 상환 시스템, 금융 교육 강화, 금융소외 계층 대상의 신용회복 프로그램 정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주택 가격 안정화, 소득 분배 개선, 사회안전망 강화가 병행되어야만 가계가 빚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소득보다 이자가 더 무서운 사회’로 진입했다. 눈에 보이는 수치는 늘었지만, 실제 삶은 더 불안정해졌고, 미래는 점점 더 멀어진다. 2000조 원이라는 거대한 부채 총액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속에 수백만 가계의 무너지는 일상과 침묵 속 고통이 있다는 점이다. ‘이자만 내고 버틴다’는 말이 더는 비유가 아닌,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그 끝에서 대한민국 경제는 과연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