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산업 전망 2026] ④ 전고체 시대의 글로벌 공급망 전쟁.."승자 국가가 바뀐다"
[아시아에이=남기성 기자]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되면 가장 먼저 충격을 받는 영역은 공급망이다. 지금까지의 배터리 산업은 양극재·음극재·분리막·액체전해질 중심의 리튬이온 생태계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지만, 전고체 배터리 시대에는 고체전해질·리튬금속·실리콘 음극재·단결정 양극재 등 핵심 소재 구조가 완전히 바뀌면서 국가 간 경쟁 구도도 재편된다.
한국·일본·중국·미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고체 공급망 전략을 취하고 있으며, 2029~2032년 전고체 상용화 초기 국면에서 어떤 국가가 가장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가 산업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전고체 시장에서 승부를 가르는 것은 기술 발표가 아니다. 고체전해질 대량 합성 능력, 대면적 전극 건식 코팅·프레스, 세라믹·황화물 계면 안정화, 소결 공정 수율 확보 등 제조 난이도가 전기차 배터리 역사상 가장 높은 기술이기 때문에, 실제로 양산 가능한 공정·장비 기반을 갖춘 국가만이 전고체 상용화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다.
국내의 해당 분야 한 전문가는 “전고체는 기술이 아니라 제조다. 공정 수율을 확보하지 못하면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시장에서는 패배한다”고 설명한다.
한국은 이 경쟁에서 가장 균형 잡힌 구조를 보여주는 국가다. 삼성SDI는 황화물계 고체전해질 합성 기술과 전고체 파일럿 라인(ASB)을 이미 가동 중이고, LG에너지솔루션은 산화물계 기반의 장수명 전고체 기술을 개발하며 세라믹 전해질 공급망을 확장하고 있으며, SK온은 황화물계 전해질을 기반으로 미국 ARPA-E 프로젝트와 협력하며 고체전해질 계면 안정화 기술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은 특히 실리콘 음극재·단결정 양극재 분야에서 이미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건식 코팅·고압 프레스·소결 장비 등 전고체 생산에 필수적인 장비 생태계도 국내 중견기업들이 주도하고 있어 전고체 시대에 가장 완성도 높은 공급망을 가진 국가로 평가된다. 한 소재 회사 CTO는 “한국은 전고체 시대에 필요한 소재·장비·공정 세 축을 모두 자체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라고 말한다.
일본은 황화물계 고체전해질 원천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이며, 도요타·파나소닉·NEDO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수직계열화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강점은 전고체의 핵심 중 하나인 초저수분 공정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안정화했다는 점이다.
도요타가 “황화물계 전고체는 일본이 가장 잘 알고 가장 먼저 양산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다. 다만 일본은 장비 의존도가 높고, 대면적 전극 자동화 분야에서는 한국과 유럽보다 다소 뒤처진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소재 원천기술과 도요타 중심의 폐쇄형 생태계를 기반으로 전고체 초기 경쟁에서 강력한 위치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기술·제조 경쟁보다 정책으로 시장을 재편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세액공제 규정은 전고체 배터리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셀·모듈 생산 시 최대 45달러/kWh까지 보조금이 지급된다. 이는 글로벌 전고체 기업들이 “기술은 어디에서 개발하더라도 생산은 반드시 미국에서 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미국의 대표 전고체 기업은 QuantumScape(산화물계), Solid Power(황화물계), Factorial Energy(리튬금속 기반 ASSB) 등이 있으며, 폭스바겐·BMW·포드·현대차 등이 이들과 직접 협력하면서 미국 중심의 전고체 공급망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약점은 소재 공급망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점이며, 이 때문에 IRA를 통해 고체전해질·리튬금속·실리콘 음극재 생산을 북미 지역으로 강제 유도하고 있다.
중국은 기술 경쟁에서는 뒤처져 있지만, ‘양산 속도전’이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CATL과 BYD는 전고체로 바로 가지 않고, 먼저 반고체(고체+액체 혼합 전해질)와 준(準)전고체를 대량 양산하며 시장 점유율을 넓히는 전략을 선택했다.
CATL은 2027년 완전 전고체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HiNa Battery 등 중국 업체들은 2026년 전고체 기반 셀 출시 계획을 밝힌 상태다. 중국은 전고체 원천기술은 부족하지만, 저가형 실리콘 음극재·리튬금속·대량 생산 공정에서 경쟁력이 매우 높아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전고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국가로 평가된다.
이처럼 국가별 전고체 공급망 전략은 완전히 다르지만, 승부는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갈린다. 바로 ‘대량 생산 공정 수율 확보’다. 삼성SDI·LG엔솔·도요타처럼 실제 대면적 전고체 전극을 생산할 수 있는 파일럿 라인을 돌리는 기업만이 2029~2032년 전고체 상용화 1차 무대를 장악할 수 있다. 랩스케일 기술은 중요하지만, 상용화는 공장 가동에서 결정된다. 전문가들은 “전고체 시대의 승자는 기술 발표가 아니라 공정을 통해 증명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전고체 초기 승자는 한국과 일본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봐야 한다. 한국은 소재·장비·공정·고객 생태계를 모두 갖춘 국가이고, 일본은 원천 특허와 도요타 중심의 강력한 폐쇄형 공급망이 있다.
미국은 IRA를 통해 ‘전고체의 미국화를 강제’하면서 중기적으로 빠르게 시장을 따라잡을 것이고, 중국은 가격 경쟁력과 대량 양산 능력을 기반으로 후발주자임에도 단기간에 추격할 가능성이 높다. 전고체는 국가 단위 제조력을 시험하는 기술이며, 2029~2032년은 전기차 산업의 주도권이 다시 판가름나는 시기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