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환율안정에서 배우는 한국 전략] ① 덴마크는 어떻게 40년간 환율을 지켜냈나 ‘믿음의 경제학’
투기자본이 공격을 포기하게 만든 정책 일관성과 신뢰의 축적 외환보유액보다 강력한 무기, 정부·정치·제도의 신뢰 시스템 재정·금융의 건전성이 환율안정으로 전이되는 메커니즘 정권 교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 체계가 만든 예측가능성 변동성 시대, 환율을 지키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신뢰 한국이 배워야 할 환율안정 전략 "신뢰 기반의 시스템 구축"
[아시아에이=최지연 기자] 덴마크는 국제금융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고정환율제는 원칙적으로 유지가 어렵고, 시장에서 투기공격이 발생하면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만으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이 제도를 시도하고 실패하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실제로 고정환율을 유지하던 국가들이 결국 자본유출, 외환보유액 고갈, 금리 폭등, 경기침체를 겪으며 페그를 포기하거나 변동환율로 전환한 사례는 수십 개에 이르지만, 덴마크만큼 오랜 기간 페그를 흔들림 없이 지속한 나라는 거의 없다. 덴마크 크로네화는 1980년대에는 독일 마르크화에, 1999년 이후에는 유로화에 고정되어 있으며 이는 단순히 외환시장 개입으로 유지된 정책이 아니라 40년 동안 이어진 국가 전체의 구조적 안정성에서 비롯된 결과다.
국제금융학자들이 덴마크를 ‘Danish Exception(덴마크 예외)’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페그가 길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덴마크가 고정환율의 취약성을 무력화한 거의 유일한 국가라는 점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정환율제는 외부충격에 매우 민감한 구조를 갖고 있고, 투기세력은 중앙은행의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공격에 나서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덴마크는 국제금융시장에서 ‘공격해봐야 소용없는 나라’로 자리 잡았고, 이는 어떤 충격이 오더라도 정부와 중앙은행이 환율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는 신뢰가 오랜 기간 축적된 결과다. 덴마크는 단 한 번도 환율 유지 의지를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보여주었고,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한 신뢰의 자산으로 축적되어 투기세력의 기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40년 동안 단 하나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반복했다. “덴마크는 어떤 경우에도 페그를 유지한다.” 이 문장은 수십 년 동안 시장의 기대를 결정짓는 기준점이 되었다.
중앙은행의 말과 실제 정책이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고, 설령 경제가 침체를 겪거나 외부 충격이 덴마크 경제에 타격을 주더라도 중앙은행은 목표 환율을 단기 경제보다 우선 순위에 두는 정책 태도를 유지해왔다. 시장은 이 일관성을 학습했고, 결국 ‘덴마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굳어지면서 투기공격의 유인이 원천적으로 사라지는 구조가 완성되었다.
환율 안정은 외환보유액의 규모만으로 논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물론 덴마크는 5500억 DKK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보유하고 있고, ECB와의 스왑라인까지 갖고 있지만, 단기외채 규모와 비교하면 외환보유액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시장이 덴마크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외환보유액 때문이 아니라, 공격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확신 때문이며 이 확신은 오직 정책 신뢰로부터 나온다. 정책 신뢰는 숫자로 계산하기 어려운 무형의 자산이지만, 시장에서는 외환보유액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력으로 인식되며 이것이 바로 덴마크가 유지해온 ‘신뢰 기반 환율안정 시스템’의 핵심이다.
정치적 안정성도 덴마크 환율의 중요한 축이다. 덴마크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환율 정책에 대한 초당적 합의가 존재하며, 환율 안정이라는 장기 목표는 정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이는 경제정책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극대화해 시장 변동성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진다.
한국처럼 정권 변화에 따라 경제정책, 재정 기조, 노동정책이 급격히 달라지는 환경에서는 환율이 가장 먼저 요동치지만, 덴마크에서는 정책의 방향성과 목표가 정권마다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이 장기적 관점에서 덴마크를 ‘안정적 국가’로 인식하게 된다.
재정건전성과 금융안정은 덴마크 환율안정에 또 다른 기반을 제공한다. 덴마크는 구조적 재정적자 상한을 잠재 GDP의 0.5%로 제한하는 엄격한 Budget Act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가 채무비율도 선진국 중 최저 수준이다.
금융부문 역시 과거 위기를 계기로 대폭적인 구조조정과 감독 강화가 이루어졌고, 은행의 자본비율과 유동성 비율 또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재정·금융 안정은 외환시장에 직접적으로 신뢰를 제공하며, 중앙은행이 환율 방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덴마크의 고정환율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재정·금융·제도가 하나로 작동하는 ‘신뢰 인프라’가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인프라는 더 견고해졌다. 덴마크의 사례는 환율 방어가 단기적인 외환개입이나 일시적 조치가 아니라 국가의 시스템이 결합해 만든 구조적 안정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은 지금 금리 변동성, 미·중 갈등, 대외수요 둔화, 가계부채 증가 등 복합적 리스크 속에서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으며, 단기적 대응만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 덴마크가 보여준 40년의 경험은 한국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다.
환율 안정은 외환보유액의 크기보다 정책 일관성과 신뢰 수준, 정책의 예측가능성, 정치적 합의, 그리고 재정·금융 안정이라는 구조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덴마크가 환율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숫자가 아니라 국가가 만들어낸 ‘신뢰의 시스템’이었다. 한국이 환율 안정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당장의 수치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