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경제 위기 진단] ② 낍화의 추락..통화가치 붕괴와 인플레이션 악순환
가치를 잃어가는 낍화와 흔들리는 국가 통화 신뢰의 붕괴 과정 외환보유액 고갈이 촉발한 환율 불안과 이중환율 구조의 심화 현상 수입물가 폭등 속에서 무너진 실질소득과 가계생활의 압박 확대 금리·환율 사이에서 효과를 잃어가는 중앙은행의 정책 딜레마 달러화로 기울어진 경제 구조가 만들어낸 장기적 취약성의 현실
[아시아에이=최지연 기자] 라오스 경제 위기의 중심에는 ‘낍(Kip)’의 급격한 추락이 있다. 화폐의 가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이자 국가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라오스 낍화는 그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불과 2022년 이후 달러 대비 환율이 두 배 가까이 급등했고, 2025년 현재 1달러는 약 22,000낍 수준으로 거래된다. 정부는 환율 방어를 시도했지만, 외환보유액은 11억 달러 남짓에 불과했다. 경제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은 이 외환 버퍼는 한두 달 수입에도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라오스 중앙은행은 시장 개입 대신 행정 통제에 나섰다. 수입업체의 외화 사용을 제한하고, 달러 거래를 금지했으며,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의 차이를 줄이려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이중환율(multiple exchange rate)’ 문제를 심화시켰다. 공식환율로는 외화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기업들은 암시장으로 몰렸다. 암시장 환율은 공식가보다 15~20% 비싸게 형성됐고,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라오스의 화폐 불안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수출보다 수입이 많고, 경상수지가 적자를 반복한다. 특히 석유·가공식품·의약품 등 필수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산업이 취약해 수출로 외화를 벌기 어렵고, 관광산업은 팬데믹 이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외화가 들어올 통로가 막히자 낍화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달러 강세 역시 불운이었다. 2023년 이후 미국이 고금리를 유지하자, 신흥국 통화는 일제히 약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라오스는 그 중에서도 하락폭이 가장 컸다. 인근 베트남 동(VND)이나 태국 바트(THB)가 5~10% 하락에 그쳤던 반면, 낍화는 같은 기간 40% 이상 가치가 떨어졌다. 시장은 라오스의 재정건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투기성 자금이 빠르게 이탈했다.
화폐 가치가 무너지자 국민들의 행동도 바뀌었다. 라오스에서는 급여를 받자마자 달러나 태국 바트로 환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일부 상점은 낍화를 받지 않고 외화만 받는 경우도 생겼다. ‘달러화 경제(dollarization)’ 현상이 본격화된 것이다. 외환 부족으로 은행에서 달러를 찾기 어려워지자, 비공식 환전상과 암시장이 번성했다. 중앙은행이 아무리 공식환율을 고시해도 실질 거래는 이미 시장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인플레이션은 이런 환율 불안을 기름처럼 부추겼다. 2024년 라오스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2%를 넘어섰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식료품 가격이 1년 만에 30% 올랐고, 연료는 2배 가까이 뛰었다. 공공요금 인상과 운송비 상승이 겹치며 생활물가는 폭발했다. 농촌지역에서는 생필품을 사기 어려워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했다는 보도도 있다.
라오스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며 통화안정을 시도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금리를 인상하면 물가 압력을 누를 수 있지만, 동시에 기업과 가계의 대출 부담이 급증한다. 중소기업은 이미 원자재 수입대금 결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금리 인상은 경영난을 악화시켰다. 정부는 금리를 내리자니 낍화가 무너지고, 올리자니 내수가 얼어붙는 ‘정책의 딜레마’ 속에 갇혀 있다.
한편 외국인 투자자들은 라오스를 떠나고 있다. 낍화 가치가 불안정하면 자본회수가 어렵고, 이익이 손실로 바뀌기 때문이다. 2024년 이후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전년 대비 35% 감소했다. 신규 프로젝트 대부분이 중단되거나 보류됐다. 해외기업들은 라오스 내 공장을 폐쇄하거나 태국·베트남으로 이전했다. 투자 이탈은 외화 부족을 더 심화시켰고, 다시 환율 급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문제의 근본은 경제의 ‘달러 의존 체질’이다. 라오스 정부와 기업의 부채 대부분이 달러로 표시되어 있다. 낍화 가치가 하락하면 외채 상환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1달러=10,000낍일 때 1억 달러의 부채는 1조 낍이지만, 환율이 20,000낍으로 오르면 부채는 2조 낍이 된다. 단순한 환율 변화가 국가 재정을 두 배로 압박하는 셈이다.
라오스 중앙은행이 외환시장 개입을 포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정된 외환보유고를 시장에 풀면 단기적으로는 낍화를 방어할 수 있지만, 몇 달 안에 외환이 고갈될 위험이 크다. 따라서 정부는 ‘관리된 부유환율’ 정책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시장은 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암시장 환율이 공식환율보다 높게 형성되면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점점 실효성을 잃고 있다.
라오스의 화폐위기는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제이기도 하다. 급등한 물가로 가계부채가 급증했고, 실질임금은 3년간 약 20% 줄었다. 청년층은 일자리를 찾아 태국이나 베트남으로 떠나고 있다. 송금이 외화의 주요 공급원이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해외노동자의 돈’이 국가경제를 버티는 버팀목이 되었다.
정부는 외환위기 진화를 위해 IMF, ADB 등 국제기구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재정투명성 강화와 통화제도 개혁이 논의되고 있지만, 라오스는 여전히 신용등급이 낮고 차입 여건이 불리하다. 외부 지원이 들어온다 해도, 근본적인 산업 기반 강화 없이는 낍화의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라오스의 화폐가치 붕괴는 한 나라의 구조적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다. 산업 다변화 없는 외채 의존, 수입물가 급등에 대응하지 못한 통화정책, 달러 강세에 무방비로 노출된 외환체계. 이 모든 요인이 겹쳐 라오스는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국민들은 이제 “낍화로는 미래를 계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상점에서는 외화 가격표가 붙고, 정부는 여전히 공식환율을 고시하지만, 시장은 이미 달러화로 움직이고 있다. 화폐의 신뢰가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약속이 흔들린다는 의미다.
라오스가 다시 낍화의 가치를 되찾으려면, 단순한 통화정책이 아니라 경제구조 전체의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생산성이 높아지고, 수출이 늘고, 재정이 건전해질 때 비로소 화폐는 다시 신뢰를 얻는다. 지금 라오스의 낍화는 단지 종이가 아니라, 부채로 지탱된 국가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