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전망] ⑦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의 구조적 한계와 피해 사례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구조적 허점 국내 투자자 수만 명 피해에도 법적 보호는 사각지대 테라 사태, 규제 사전 예방 실패의 상징 ‘디지털 그림자 화폐’에서 제도권 통화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은
[아시아에이=최지연 기자] 2022년 봄, 전 세계 디지털 자산 시장을 충격에 몰아넣은 테라-루나 사태는 단순한 투자 실패를 넘어, 스테이블코인이 어떤 조건 하에서 금융 시스템을 위협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당시 테라USD(UST)는 알고리즘에 기반한 스테이블코인으로, 보완 토큰인 루나(LUNA)를 통해 달러와의 가치를 1:1로 유지하는 구조였다.
이론적으로는 ‘담보 없는 화폐 안정’이라는 혁신을 제시했지만, 실제 시장은 그것을 신뢰하지 않았다. 매도세가 시작되자 UST는 순식간에 가치가 붕괴됐고, 루나도 함께 폭락했다. 일주일도 안 돼 약 600억 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고, 이로 인해 글로벌 투자자 수백만 명이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 사태의 중심에는 ‘한국’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테라폼랩스는 한국인이 창립한 회사였고, 사업도 한국을 주요 거점으로 전개했다. 수많은 국내 투자자들이 이 플랫폼에 투자했고, 피해자 대다수가 국내에 분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금융당국은 책임을 명확히 묻기 어려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테라와 루나는 특금법상 가상자산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자본시장법상 증권성 판단도 이루어지지 않아 법적 공백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발행 주체가 자율적으로 만든 알고리즘 구조에 대해 사전 심사나 인허가 체계를 적용하지 않았으며, 국내 거래소들이 테라-루나를 상장하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이는 동안에도 별다른 제재 조치는 없었다.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대부분은 거래소가 “투자자 유의사항을 고지했다”는 이유로 기각되거나 지연되고 있다.
테라 사태는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다. 준비금이나 담보 없이 오직 ‘시장 유인’과 ‘토큰 설계’에만 의존해 가치를 유지하려는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은, 시스템 전체가 신뢰에 기초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문제는 신뢰가 무너지면 모든 구조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는 점이다.
가격이 1달러 아래로 흔들리는 순간, 투자자들은 대거 탈출을 감행하고, 알고리즘은 더 많은 보완 토큰을 발행하면서 오히려 붕괴 속도를 가속화한다. 이는 이른바 ‘죽음의 나선(death spiral)’이라 불리는 구조로, 테라의 몰락이 바로 이 전형적인 경로를 밟았다.
국제금융기구들은 이미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위험한 통화 대체물로 규정하고 있다. BIS는 “담보 기반이 없는 스테이블코인은 금융 안정성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IMF와 IOSCO 역시 알고리즘형 모델을 제도권 내 통화 시스템으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유럽연합(EU)의 MiCA 규제안은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을 명시적으로 금지 대상으로 포함했고, 일본은 은행권만이 발행할 수 있도록 제도화함으로써 알고리즘형 모델을 시장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상태다. 국내 가상자산거래소는 수많은 토큰들을 상장하면서도, 발행 구조나 담보 상태에 대한 공시 의무를 면제받고 있다. 테라 사태 당시 다수 거래소는 루나를 끝까지 거래 가능 상태로 유지했고, 가격 폭락이 시작된 이후에도 몇 시간 혹은 수일간 거래를 허용해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이 과정에서 거래소는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올렸지만, 투자자 보호는 사실상 방기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알고리즘형 스테이블코인의 무분별한 발행을 제도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준비금 기반’과 ‘인가제 도입’이다. 발행자는 법정통화나 국채 등 고신뢰 자산을 100% 이상 담보로 확보하고, 그 상태를 외부 감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또한 발행 자체는 금융당국의 인허가를 받은 기관만이 할 수 있어야 하며, 소비자 보호 장치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금융적 안정성 확보 차원이 아니라, 디지털 자산 시장의 공공성과 책임성을 담보하는 핵심 조건이다.
테라 사태는 단순히 하나의 프로젝트 실패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과 세계가 디지털 금융의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묻는 시험대였다. ‘탈중앙성’과 ‘혁신’을 내세우며 법의 사각지대에 머무르려는 움직임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고 디지털 금융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은, 또 다른 테라를 막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