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전산업의 몰락] ③ 샤프, ‘액정 왕국’의 추락
LCD 제국에 안주하다 OLED 전환 기회 상실 경직된 의사결정과 폐쇄적 문화로 위기 대응력 마비 내수시장 의존이 혁신 압박을 약화시켜 글로벌 경쟁력 상실 구조조정 실패와 핵심 인력 이탈로 조직력 붕괴 폭스콘 인수로 상징적 브랜드에서 하청 기업으로 전락
[아시아에이=송기철 기자] 샤프는 한때 일본 가전 산업의 자존심이자, 디스플레이 기술의 상징이었다. ‘액정의 샤프’라는 별명은 그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었다. 브라운관에서 LCD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샤프는 세계 최초로 대형 액정TV를 상용화하며 프리미엄 TV 시장을 휩쓸었고, 한때 글로벌 LCD 패널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 내수시장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도 ‘샤프 TV’는 고급 브랜드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러나 이 영광은 10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디지털 혁명과 스마트 디바이스의 확산으로 산업 구조가 급변하자, 샤프는 변화에 뒤처졌고 경직된 의사결정과 폐쇄적 조직문화는 위기 대응을 마비시켰다. 결국 샤프는 ‘기술왕국’에서 ‘몰락의 상징’으로 추락하며 일본 전자산업 쇠락사를 대표하는 사례가 되었다.
샤프의 몰락을 불러온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OLED 전환 지연과 LCD 설비 과잉 투자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 디스플레이 업계는 OLED를 차세대 기술로 지목하며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다. 삼성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 등 한국 기업들은 과감한 설비 투자와 기술개발에 나섰고, 중국 BOE 등도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빠르게 추격했다.
반면 샤프는 기존 LCD 설비의 감가상각을 이유로 OLED 전환을 미뤘다. 그 사이 시장 수요는 급감하고 LCD 패널 가격이 폭락하자 샤프는 대규모 적자에 빠졌다. 특히 2010년대 초반부터 LCD 가격 하락 폭이 커지며 샤프의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자금 유동성 위기까지 겹쳤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 전환 실패에만 있지 않았다. 샤프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 것은 폐쇄적 조직문화와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였다. 샤프의 경영진은 위기 상황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보다 내부 결속을 우선시하며 위기를 ‘일시적 경기침체’로 치부했다. 연공서열 중심의 인사체계와 내부승진 위주의 경영진 구성은 외부 기술·인재 유입을 가로막았고, 급격한 전략 전환을 위한 혁신적 의사결정은 번번이 지연됐다.
현장에서는 시장 붕괴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됐지만, 위기 신호가 최고경영층에 전달되기까지는 수개월 이상 걸리기도 했다. 이러한 ‘보고 지연’과 ‘합의 우선’ 문화는 일본 대기업의 전형적 특성이었지만, 글로벌 시장의 격변기에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샤프의 몰락에는 일본 내수시장이라는 ‘안전망’도 한몫했다. 일본 내수시장은 충성도가 높고 규모도 커서, 글로벌 점유율이 하락해도 단기 실적에는 큰 타격이 없었다. 이 안정성은 역설적으로 혁신 압박을 약화시켰다. 샤프는 오히려 기존 LCD 생산라인의 유지에 집착하며 설비투자를 이어갔고, 그 결과 고정비 부담은 더욱 커졌다.
반면 세계 시장은 이미 OLED와 스마트 디스플레이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삼성과 LG가 OLED 기반 프리미엄 TV 시장을 장악했고, BOE 등 중국 업체들도 중저가 LCD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다. 샤프는 고부가가치 시장에서도, 저가 대량 시장에서도 모두 밀려나는 이중의 압박에 직면했다.
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도 번번이 실패했다. 일본 정부와 금융권은 수차례 자금지원을 시도했지만, 샤프 내부의 저항과 지연으로 실행력이 떨어졌다. 대규모 인력 감축과 사업부 정리 계획은 노조와 임원진의 반발로 표류했고, 이 과정에서 핵심 인력들이 회사를 떠나며 기술 경쟁력마저 약화됐다.
일본 기업 특유의 집단적 합의문화는 신속한 결정을 가로막았고, 사외이사·외부 경영자 영입에도 소극적이었다. 결국 외부와의 협력 없이 내부 자원만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2016년, 샤프는 대만 폭스콘에 인수되며 일본을 대표하던 독립 브랜드의 정체성을 잃었다. 폭스콘은 샤프의 LCD 설비와 브랜드를 활용해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의 수탁 생산에 집중했고, 샤프는 더 이상 일본의 자주적 기술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액정의 샤프’라는 별명은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동시에, 변화에 눈감은 대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 되었다.
샤프의 몰락은 일본 가전 산업 전체의 몰락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이 사례는 단순한 기술 경쟁력 문제를 넘어, 조직문화·의사결정 구조·혁신 지체·위기 대응력 부재라는 구조적 한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준다.
기술력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변화에 대한 유연성과 개방적 혁신, 과감한 의사결정 없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샤프는 몸소 증명했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액정 왕국’은 변화에 눈감은 대가로 일본 가전 쇠락사의 서글픈 이정표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