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의 그늘] ⑫ 부동산 부양에 기댄 노무현 정부…가계부채 폭증의 전환점

2025-09-15     송기철 기자

[아시아에이=송기철 기자]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전임 김대중 정부 말기 카드대란의 후폭풍 속에서 출발했다. 당시 신용불량자 400만 명 이상이 발생하며 금융시스템은 극심한 신용 경색에 빠져 있었고, 소비심리와 투자 의욕은 바닥에 가까웠다. 외환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수침체가 다시 고착되는 양상이었고, 정부는 경기 부양이라는 절박한 과제를 떠안았다. 노무현 정부는 ‘경제 회생’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등에 업고, 빠른 시일 내 체감할 수 있는 경기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정부가 선택한 핵심 수단은 부동산 시장을 경기 회복의 견인차로 삼는 것이었다. 정부는 주택거래 활성화를 통해 건설·금융·소비 전반의 파급효과를 노렸고, 부동산 경기 부양이 곧 내수 회복과 고용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이를 위해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 공급 확대를 유도하며, LTV(주택담보인정비율) 규제를 완화하고 DTI(총부채상환비율) 도입을 미루었다. 당시 명목금리는 2004~2006년 점진적으로 인상됐지만, 물가가 안정적이어서 실질금리는 낮았고, 이는 대출 수요를 자극했다.

자료정리=아시아에이

은행들은 공격적으로 대출 경쟁에 나섰다. 담보가치만 충분하면 소득심사를 느슨하게 적용했고,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을 결합한 ‘패키지 대출’도 대거 출시했다. 중산층뿐 아니라 청년·신혼부부까지 주택구매 열풍에 뛰어들었고, 가계는 소득 능력을 초과한 차입을 감수하면서까지 주택시장에 몰렸다. ‘빚 없이는 집을 살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 결과 가계신용(가계부채)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3년 470조 원 수준이던 가계신용은 2007년 680조 원으로 4년 만에 200조 원 이상 늘었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55%에서 70% 이상으로 치솟았다. 같은 기간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40% 가까이 상승했으며, 수도권은 일부 지역에서 2배 가까이 뛰었다. 부동산 자산 가격 급등은 자산을 가진 계층에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겼지만, 무주택 서민층·청년층은 자산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빚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정리=아시아에이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구조적으로 취약한 가계부채 기반을 고착화시켰다. 카드대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가계는 대규모의 장기 주택담보대출을 떠안았고, 소득보다 부채 증가 속도가 훨씬 빨랐다. 당시 실질소득 증가율은 2% 내외에 그쳤지만, 가계신용 증가율은 연평균 9% 안팎에 달했다. 실질소득이 늘지 않은 상태에서 대출이 늘면, 경기 하강기엔 상환 부담이 폭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책의 일관성 부족도 문제였다. 주택가격 급등과 투기 논란이 불거지자 정부는 2005년 이후 뒤늦게 DTI 규제를 도입했지만, 규제가 강화될 때마다 거래 급감과 경기 위축 우려가 나오면 다시 규제를 완화했다. 이 같은 ‘완화→과열→규제→거래 급감→완화’의 정책 롤러코스터는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주었고, 가계는 ‘지금 아니면 못 산다’는 심리에 쫓겨 빚을 더 내 주택을 매입했다.

사진=뉴스1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시기 가계부채가 단기 소비성 대출이 아니라 장기 고정성 채무 중심으로 구조화되었다는 점이다. 주택담보대출은 만기가 길고 상환 유연성이 낮아 경기 변동기엔 충격 흡수 능력을 약화시킨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국 가계부채가 직접 위기를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높은 부채 수준은 금리 상승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올 경우 취약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왔다. 가계부채의 급격한 누증은 한국 경제가 외부 충격에 더욱 민감해지는 구조적 배경으로 자리잡았다.

노무현 정부는 표면적으로 신용질서 회복과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 각종 세제·금융 대책을 내놓았지만, 결과적으로 부채를 성장 동력으로 삼는 정책 선택이 가계의 구조적 리스크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다. 단기적으로는 건설투자·소비 지표가 회복되었지만, 실질소득 증가 없이 대출만 늘어난 상태에서 형성된 경기 회복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업계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중심 성장 전략은 단기 부양 효과는 있었지만, 장기적 금융안정성 확보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이 시기 급증한 가계부채는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유럽 재정위기 등 외부 충격기에 한국 경제의 ‘약한 고리’로 지목됐으며, 지금까지 이어지는 만성적 가계부채 문제의 출발점이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