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의 그늘] ⑪ 김대중 정부 신용카드 정책 실패, 부채 폭발의 불씨
소비 진작 위해 카드 발급 남발, 빚의 씨앗 심어 신용심사 없는 대출, 사회 초년생까지 빚의 늪으로 2003년 카드 대란, 400만 신용불량자 양산 공적자금 투입, 사회 전체가 떠안은 정책 실패 비용 단기 부양책의 유혹, 장기 금융안정성 무너뜨려
[아시아에이=송기철 기자]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 사회는 경제 시스템 전체가 붕괴 직전인 초유의 위기를 겪었다. IMF 관리체제 속에서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고, 금융기관은 연쇄 부실로 무너졌다. 실업자는 단기간에 100만 명 이상으로 치솟았으며, 가계는 생계 유지조차 버거운 상황에 내몰렸다. 이런 극한의 위기 속에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무엇보다 경제 회복과 민생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정부가 선택한 주요 전략 중 하나는 소비를 살려 내수를 회복시키는 것, 그리고 그 수단으로 신용카드 확대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신용카드 사용에 각종 세제 혜택을 부여했고, 카드사들은 공격적으로 가입자를 모집했다. 카드 발급 심사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으며, 일정한 소득이 없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에게도 손쉽게 카드를 내주었다. 신용카드는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현금서비스와 카드론이라는 새로운 대출 창구로 자리 잡았고, 이는 사실상 ‘숨은 대출 확대 정책’이었다. 가계는 현금을 쓰지 않고 소비를 늘릴 수 있었고, 단기적으로는 내수가 반짝 살아나는 듯 보였다. IMF 위기로 주저앉은 시장에 활력이 돌자, 정부는 정책 성과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소득 기반이 부족한 상태에서 빚을 통한 소비가 늘어나자 연체율이 치솟기 시작했다. 2002년을 전후해 카드 대출 연체율은 급격히 상승했고, 2003년에는 한국 금융사에 길이 남을 ‘카드 대란’이 발생했다. 수백만 명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고, 그 규모는 400만 명을 넘었다. 이들은 금융 거래에서 사실상 배제되었으며, 생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몰렸다. 기업 구조조정의 충격으로 실직한 사람들과 맞물려, 사회 전반에 ‘이중 위기’가 덮친 셈이다. 경기 부양을 위해 부추긴 신용카드 정책이 오히려 또 다른 경제·사회적 재난을 불러온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시적 금융 부작용이 아니라 정책 설계 실패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정부는 카드사들의 과도한 영업 경쟁과 무분별한 발급 행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금융감독 시스템은 존재했지만, 신용카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감독은 사후적으로 강화되었을 뿐, 이미 시장은 과열 상태로 돌이킬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카드사 파산 위기를 막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했고, 그 사회적 비용은 국민 모두의 몫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실패가 한국 가계부채 구조에 장기적 취약성을 남겼다는 점이다. 카드 대란 이후에도 가계는 소비와 생활을 신용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신용카드 사용은 줄었지만, 대신 주택담보대출·전세자금대출·신용대출 등 다른 형태의 빚이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다시 말해, 카드 대란은 “빚에 의존하는 소비·생계 구조”가 고착되는 출발점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금융개혁과 사회안전망 확충이라는 긍정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신용카드 정책만큼은 대표적인 실패로 남았다. 이는 단기 경기 부양책이 얼마나 쉽게 장기적 금융불안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자, 이후 정부들이 가계부채 문제에 접근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교훈이다.
오늘날 한국의 가계부채가 GDP를 넘어서는 2,000조 원 규모로 불어난 상황에서도, 카드 대란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정부가 단기 성장률과 체감 경기 개선에만 매달릴 경우, 부채라는 그림자는 언제든 다시 폭발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 실패는 작은 불씨가 거대한 화마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며, 지금도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경고등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