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전망] ② 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 공존인가 경쟁인가?
사적 화폐와 공적 화폐의 경합 시대 중앙은행은 어디까지 개입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나? "공존하려면 민간의 혁신성과 공공의 책임성이 결합돼야”
[아시아에이=최지연 기자]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단순한 디지털 자산 시장의 진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각국 중앙은행이 준비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의 설계 방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디지털 통화 질서의 구조 자체를 흔드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민간이 발행하는 ‘사적 화폐’와 국가가 발행하는 ‘공적 화폐’ 간의 경합은 단순한 기술력 경쟁을 넘어, 통화정책의 유효성·금융안정성·국가 통화주권의 근간까지 좌우하는 정책적 도전으로 비화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특정 자산에 가치를 연동시켜 가격 안정성을 추구하며,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통해 탈중앙화된 방식으로 유통된다. 빠른 결제 속도, 낮은 수수료, 글로벌 접근성 등을 바탕으로 특히 디파이(DeFi), 크로스보더 이커머스, 디지털 지급 결제 생태계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와 달리 CBDC는 국가가 법정통화를 디지털로 구현한 형태로, 법적 통용력을 가지며 금융 포용성과 통화정책 전달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다. 이 두 시스템은 사용자의 편의성 증대, 국경 간 거래의 효율화, 현금 없는 사회로의 이행 등 공통 목표를 지니지만, 위험과 책임의 주체, 발행 구조, 정책 수단이라는 측면에서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이러한 이중 화폐 구조가 향후 글로벌 금융 인프라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민간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이 실질적인 결제수단으로 사회 전반에 정착하게 되면, 중앙은행은 통화량 조절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구조적인 제약을 받게 된다. 예컨대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거래량이 전체 지급결제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면, 금리 정책이 실물경제로 전달되는 경로가 약화될 수 있으며, 민간 발행자가 통화 유통을 좌우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위기 상황에서는 그 취약성이 더욱 부각된다. 스테이블코인이 연동된 준비자산의 시장 가치가 하락하거나 발행 주체의 신뢰가 붕괴될 경우, 투자자와 소비자의 대규모 이탈이 발생하며 시장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페그 붕괴’ 사례는 이미 테라-루나 사태에서 경험한 바 있으며,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는 경로는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즉,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수단으로 기능할수록 공공성을 띠지만, 민간이 책임을 지지 못할 경우 오히려 금융 안정에 악영향을 미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CBDC의 도입도 단순한 '공적 해법'이 아니다. 정부가 직접 디지털 법정통화를 발행할 경우, 민간 결제 시스템의 위축, 개인정보 침해 우려, 중앙집중적 통제 강화 같은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 특히 상업은행이 맡고 있는 예금·결제 기능이 중앙은행으로 집중되면, 민간 금융기관의 자금중개 기능이 약화되고, 이로 인한 신용경색 리스크가 생길 수 있다. 또한, 모든 거래가 중앙은행 장부에 기록되는 구조는 실시간 감시체제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어, 시민의 프라이버시 권리와 금융자율성 훼손이라는 우려도 낳고 있다.
이처럼 스테이블코인과 CBDC의 관계는 단순히 규제 대 자유, 공공 대 민간의 대립 구도가 아니다. 각국 정부는 양자가 서로를 대체하거나 억제하기보다는, 상호 보완적·보완적인 방식으로 설계되도록 정책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는 기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거시적 통화정책의 문제다. 실제로 BIS는 “CBDC와 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하려면 민간 영역의 혁신성과 공공 영역의 책임성이 균형 있게 결합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역시 이런 세계적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각각의 접근법을 유지하며 디지털화폐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있으나,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입법 공백과 CBDC의 설계 지연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단순히 대응하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스테이블코인과 CBDC가 공존 가능한 제도적·기술적 환경을 선제적으로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바로 디지털 통화 질서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길이자, 금융 소비자 보호와 통화주권 강화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