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학고재 디자인 | 프로젝트 스페이스
2020년 9월 9일(수) – 9월 30일(수)

이정호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전시전경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전시전경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아시아에이 = 김창만 기자] 학고재 디자인·프로젝트 스페이스는 2020년 9월 9일부터 9월 30일까지 이정호(b.1984, 뉴욕)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을 전시 중이다.

이번 전시는 아티스트 이정호의 최근작 7점을 선보이는자리다. 이정호는 혼돈과 질서가 공존하는 장면에 주목한다. 공사현장이나 쓰레기 더미, 작업실 바닥의 얼룩과 자국 등을 소재로 삼는다.

이정호, 흔적 집합 Aggregate Remains, 2020, 린넨에 아크릴릭 Acrylic on linen, 162.5x259cm (162.5x129.5cm x2)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흔적 집합 Aggregate Remains, 2020, 린넨에 아크릴릭 Acrylic on linen, 162.5x259cm (162.5x129.5cm x2)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무제 (s) II Untitled (s) II, 2020, 판넬에 아크릴릭 Acrylic on panel, 31x31cm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무제 (s) II Untitled (s) II, 2020, 판넬에 아크릴릭 Acrylic on panel, 31x31cm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전시에서선보이는 연작에서는 작업실 바닥 표면에 생긴 수많은 얼룩과 무늬를 뜯어내 재료로 활용한다. 뜯어낸 조각들을 캔버스 위에 콜라주 형식으로 재구성한다.무질서하게 엉겨 붙은 얼룩의 집합 가운데 미적 질서를 찾아내려는 시도다.

이정호, 바닥에 자국들 I Stains on the Floor I, 2020, 린넨에 아크릴릭 Acrylic on linen, 56x61cm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바닥에 자국들 I Stains on the Floor I, 2020, 린넨에 아크릴릭 Acrylic on linen, 56x61cm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무제 (s) VII Untitled (s) VII, 2020, 판넬에 아크릴릭 Acrylic on panel, 31x31cm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무제 (s) VII Untitled (s) VII, 2020, 판넬에 아크릴릭 Acrylic on panel, 31x31cm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는 198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2012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스쿨 순수미술전공 학사 졸업 후 2016년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순수미술학전공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갤러리마크(서울), 69 앨드리지(뉴욕) 등에서 개인전과 쿡 프로젝스(뉴욕),더 팩토리 LIC(뉴욕), 리히튼파이어(뉴욕)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파리국제예술공동체(파리), 장생포 아트스테이(울산) 등의 레지던시에입주한 이력이 있다. 현재 서울 및 뉴욕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전시 서문


이정호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전시전경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전시전경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형태의 지속성

로버트 C. 모건 | 미술비평가

이정호 작가가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 왔는데, 그의 그림은 표면 위 형태의 지적인 개선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탁월한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에너지는 무궁무진하다.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점점 진화해가는 그의 정교함은, 그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그 방법뿐 아니라, 그림과 관련된 사상에도 그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두 번째 속성은 이 화가가 추구하는 것이 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 이는 곧 지능이 점점 높아지면서 수학이 개입하여 미술과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정호 작가는 하나의 숫자를 다른 숫자로 나누면 세 번째 숫자가 만들어지는데 이 세 번째 숫자는 전체와 관련하여 시스템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미학적으로 해석해보자면, 그는 추상표현주의를 뛰어난 이해를 통한 형식분석(formal analysis)으로 분할하여 추상화의 오류 버전에 다다른다. 이는 붓과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화가 특유의 무던한 표면을 더욱 자극한다.

나의 시각과 더불어 이정호는 요즘 예술가들이 '의도'라고 부르는 자신만의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그의 의도가 작품을 보는 나의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여부는 결코 문제 되지 않는다. 세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와 나는 대화를 통한 합의 영역을 찾은 것 같아 보인다. 이는 “미학적”이라고 불리는 관점을 말한다. 프랫 대학원에 있으면서 줄곧, 나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 관해 지적인 대화를 나눌 때면 의식이 개방되어 있고 명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식이 있기에 그는 미술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하여 품위 있게 거리를 유지한다. 가장 확실한 문화적 차이(세대적 차이뿐만 아니라)는 있지만, 그는 자신의 미술뿐 아니라 모든 미술, 특히 그림에 항시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로, 서로 화가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쾌적한 영역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것은 떠오르는 현대 예술가인 그와 함께 하는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였으며 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의 의도에 대해 언급해 보자면, 나는 그의 작가노트 중 다음 문구가 그의 작업을 정확하고 간단명료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나는 캔버스에 놓여있는 처음 몇 가지 흔적들을 나의 본능이 받아쓰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기억은 어제의 미묘한 세부 사항을 신선하게 기억한다. 이런 직관적인 흔적들이 깔리면서 한 폭의 그림을 구성해나가기 시작한다.
그가 예술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작가노트를 공개하면서, "그 전날의 미묘한 세부 사항을 신선하게 기억한다”는 말을 통해 그가 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어제의 기억이란 대부분, 매우 평범하고 일반적인 순간들이지만 작가의 시각으로는 색다르고 특별한 성격을 띠며 작가의 생각을 황홀하게 만다는 순간들이다. 예를 들면, 벽돌담에 쉽게 규정할 수 없는 흔적들, 난로 망 옆의 낙서, 인도에 더러운 자국들, 연석에 기름얼룩, 또는 나무 울타리 위에 켜켜이 쌓여진 찢겨져 나간 포스터 등이 있다. 나는 그의 이런 “디테일”을 이색적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 또는 시각적인 스펙터클(굉장한 구경거리)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많은 예술가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와는 다른 감각의 “반형식(anti-forms)”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정호가 맨해튼에서 그의 작업실이 있는 저지시티까지 운전하면서 마주쳤을 “디테일”인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가짜 귀족 예술의 난간에 기댄 고상한 예술이나 그림은 거부하고자 했다. 그는 뭔가 다른 것, 케이지의 “우연성 조작(chance operations)”과 유사한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이는 결정론을 통해 완벽함을 찾기보다는, 비현실에 기반을 둔 예술,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화라는 예술이 순수 주의자의 감각이라 추측하면서 보거나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현실적인 양태에 기반을 둔 비현실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반형식(anti-form)”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차용한다. 엔트로피는 물리 화학에서 차용된 과학 용어로 물질성의 타락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엔트로피”라는 단어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 알려진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열역학 제2법칙은 “자연계의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쇠락하고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정호는 그림이 다른 사물의 근원에서 변모되었을 때 그의 캔버스의 표면에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이것이 그가 예술가로서 또 화가로서 추구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누군가는 작가가 자신이 “디테일”이라 부른, 우연적인 순간을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보다는 그는 의식적으로 더욱 간접적이고 몽롱한 의식 상태의 과정 중심의 표현주의자의 관점에 속해 있다. 예술가로서 그의 작품은 그가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뒤에 남겨진 흔적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과도한 생산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뒤에 남겨진 잔재들이 넘쳐나는 환경을 표현한다. 그의 관찰을 통해 고차원적 질서에 의미를 가까운 과거에 황폐한 대지와 관련(접목) 시킨다. 다시 말해 그는 형태의 “부재” 또는 “반형식”을 표현하는 표면을 그림으로 만들고, 여기에서 그는 존재의 상태로서 엔트로피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신비롭게도 예술의 숨은 노출로 이어지게 된다.

무언가를 보고 느낀 후에 그것을 상상력 속에서 인식하게 되면 그것은 가장 심오한 차원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진취적인 창의력에 대한 우리의 가정을 없애 버리면서 동시에 현재를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이런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다 무엇인가? 그 그림들은 어디에서 그려졌고 또 그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장소는 저시시티의 그의 작업실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렇게 말하자면 금욕주의적 아날로그 현실로서 존재하는 문화의 중심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나폴리도 아니고 자카르타도 아니다. 그의 그림은 촉각에 의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중형/대형 작품을 선택하기에 한 폭으로 볼 것인지 또는 두 폭, 심지어 세 폭으로 볼 것인가는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이다.

그는 그림을 바닥에 직접 그리고 물감을 반복해서 덧입히는데 이 과정을 무작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캔버스가 그 위에 놓여지며 바닥이 뜯어짐과 동시에 겹겹이 쌓인 인위성은 전면으로 나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압력은 다양한 단계로 주어지는데, 그가 원하는 엔트로피의 모습을 포착했다고 느낄 때까지 물감을 칠하고 또 칠해, 역설적이게도 반형식으로 납득하게 된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예술가인 로버트 모리스의 포스트 미니멀리즘 설치 미술품과 비교할 때 더 의식적이고 우아한 반형식의 작품이 된다. 이정호 작품 표면의 토대는 창작하는 과정에서 빛에 직접 닿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더라도 그 표면은 완전히 모르는 공간이 아니다. 다만 그 표면이 명령받은 대로 그래서 종국에는 스스로 마무리 지어진 물리적인 촉각일 뿐이다. 그는 색상도, 확장된 캔버스에서 개별적으로 이용되기 전에 바닥에서 한데 통합될 수 있도록 신중하게 선택했다. 화가적 시야에서 바라본 문제점은 표면을 어떻게 효과를 주어야 감동과 연결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으로 이는 고용된 조수가 아닌 숙련된 예술가 (그)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작업실에서 본 그림 중 나는 세 점의 그림이 생각난다. 그 세 그림 모두 표면에서 공간의 물리적인 구체화와 시각적 활용이 유사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인데, 표면에 간섭하는 방법이 아니라 형태의 지속성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바뀌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캔버스는, 다른 두 개의 그림과 뚜렷한 차이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도 그리고 개념적으로도 서로 밀접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다른 작품과 아주 유사한 한 점의 그림이 그 자체의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적용법은 새로운 것이다. 이정호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 갤러리를 둘러보면 촉각의 그림(일체감을 나타내는 그림)에 촉각의 공간이 주어진다. 우리가 이제 막 이해하게 된 것은, 예술은 의미와 성취의 창문을 여전히 열어 놓고 우리 스스로 밖으로 나와 형태의 지속성이 다시 현실이 되는 세계로 이끈다.

그의 그림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시각을 새로운 각도로 보는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 기술적이면서도 예지력이 있는 방법이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보여줄 수 있다. 이런 그림에서 나오는 예술가의 증거는, 자신이 일찍이 이루어 놓은 작업들에서가 아니라, 오브제가 아닌 것에 대한 기억에서 자신의 천분을 깨닫고자 분투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술가인 그가 새로운 그림으로 다시 시작할 때 우리 관객들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 전시 서문 중 발췌-

로버트 C. 모건(Robert C. Morgan)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비평가이자 작가이며 큐레이터이자 시인이자 화가로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조각 석사학위와 현대미술사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그는 로체스터 공과대학교의 명예교수이며 현재 맨해튼의 시각예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모건 교수의 저서로는 『개념미술』(원제: Art into Ideas; 개념미술에 대한 소고, 캠브리지 1996)과 『예술계의 종말』(Allworth, 1998), 그리고 『예술가와 세계화』(Miejska Galeria Sztuki w Lodzi, 2008) 등이 있다. 1999년에 그는 스페인 살라만카 국제미술비평상을 최초로 받았으며 2011년 잘츠부르크의 유럽 과학미술 아카데미에 가입하였다. 모건 박사는 현재 잡지 『브루클린 레일』과 『artcritical.com』에 미술비평을 기고하고 있다.

이정호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전시전경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이정호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 전시전경 / 사진=Courtesy of artist, 학고재

밀림의 춤, 낯설고(uncanny) 슬픈, 그러나 한없이 아름다운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최근 몇 년간 이정호는 물질감이 매우 두드러진 추상화에 몰입해 왔다. 내가 그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과격할 정도로 거칠고 어두운 색조를 띤 일련의 추상화들이었다. 물론 화려한 천 작품들도 있었는데, 그 작품들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 화려한 천 작품들은 올이 두껍고 거친 캔버스 천을 길게 잘라 그 위에 젯소를 바른 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주황, 보라, 다홍 등등의 유성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다. 아주 뻣뻣하게 천의 질감이 느껴지는 까닭은 톱밥이 섞인 아교를 발랐기 때문인데, 그런 성질은 천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전체적으로는 커다란 천의 다발이 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정호는 축제나 제의(祭儀)에서 사용하는 거대한 가면이나 의상을 연상시키는 이 천 작품을 매우 섬세한 공력을 들여 상당한 기간 동안 제작에 열중했다. 캔버스의 프레임을 거의 뒤덮은 연두색과 노랑, 주황, 짙은 녹색의 긴 천으로 제작한 자화상은 약간 구상적 형태를 지닌 매우 독특한 작업이다. 커다란 두 눈과 캔버스 프레임 밑으로 드러난 두 개의 슬리퍼가 없었다면 아마도 거대한 몸체를 지닌 이 입체작품이 자화상이란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위치한 이 작품은 이정호가 자신의 폭발적인 예술적 에너지를 분출시킨 장(場)이었음을 충분히 입증해준다.

Ⅱ.
먼저 거칠고 어두운 색조의 입체작업에 대해 기술하는 것으로부터 글을 시작할까 한다. 그 이유는 현재 이정호의 마음과 그의 삶의 모습이 이 작품들 속에 잘 투영돼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정호의 작업실에서 본 작품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집합체(Aggregation)>, <밀림(Jungle)>, <바닥에 자국들(Stains on the Floor)> 연작이었다. 이 작품들은 작업실의 벽에 걸려있거나 바닥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그중 작업실로 들어가는 입구 안쪽 벽에 걸려있던 <바닥에 자국들(Stains on the Floor)> 연작이 주는 인상이 가장 강렬했는데, 이 연작은 다음 방의 벽 한쪽을 온통 다 차지하고 있는 120호 정도 크기의 대작 4점과 함께 왠지 모르게 슬픈 감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내가 그런 느낌을 이야기했을 때 이정호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다. 아무리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가 없는 추상일지라도 작품은 작가의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어느 날 미국의 저명한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작업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넓은 붓질의 흔적만이 어렴풋이 보이는 텅 빈 캔버스를 묵묵히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작가가 물었다. “그래, 무엇을 느끼셨나요?” 그 손님은 “참 슬프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작가는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며 당신이 내 그림을 가장 잘 알아본 사람이라고 말했다.

Ⅲ.
내가 이정호의 이 연작들을 봤을 때, 작품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밑바닥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불편하면서도(uncanny)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는데, 그러한 감정의 구체적인 진원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확대된 작품 사진을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갑자기 ‘살(flesh)’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마치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듯한 느낌의, 한국의 재래시장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우뭇가사리나 부드러운 해파리의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필시 이정호가 사용하는 재료에서 온 것일 게다. 나는 그의 작업실에서 받았던 그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감정의 진원지가 바로 그가 재료로 사용하는 물질임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정호가 작업을 하는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우선 그는 작업실의 바닥에 아크릴릭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다음 원재료가 되는 ‘아크릴릭 미디어’를 원하는 만큼 들이붓는다. 그 원액은 마치 빈대떡을 부칠 때처럼 바닥을 타고 넓게 퍼져 나간다. 판이 굳으면 바닥에서 떼어내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제작한 서로 다른 여러 개의 판들을 모아서 굳힌 다음, 찢거나 잘라 꼴라주 한다. 부분적으로는 작품의 일부로 철망이 삽입되기도 하는데, 완성작은 겉보기에 마치 지저분한 얼룩과 물감의 흔적들, 그리고 작은 이물질들이 혼합돼 바닥의 일부를 떼어낸 것처럼 거무스레해 보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의 진원지가 바로 그토록 존재의 물성을 생생하게 드러낸 얼룩과 알록달록한 물감의 흔적들, 그리고 이물질들이 혼합돼 이루어진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정호가 비록 젊은 나이지만 그 나이만큼 세상을 살아오면서 겪고 느낀 삶의 밑바탕에 대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작업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림을 그릴 때 작가가 단순히 노동만 하는 건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자연스럽게 그림 속에 갖가지 상념이 스며들게 되며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작가와 관객과의 사이에 작품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공감은 재료, 즉 물질을 통해 전달되는데, 이 양자 사이에 공감과 소통이 잘 이루어질 때 그 작품은 성공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예로 든 마크 로스코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정호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재료를 잘 선택했으며, 결과적으로 매우 실험적인 방식을 통해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생각한다.

이정호의 이번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의미라면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의식으로 회화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이정호의 작품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움(美)’의 의식적인 표출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정호처럼 예술 개념의 전복이나 미개척적인 표현 영역의 확장을 위해 분투하는 작가가 관심을 기울일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사물의 엔트로피를 극대화하는 테크닉을 개발하는 가운데 무질서를 통해 거꾸로 폐허가 된 사물에 새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의 표현을 빌면 “낡고 오래된 전자제품 더미들, 찢겨진 벽보들, 수많은 형편없는 낙서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용도가 폐기된 사물들의 가치가 발현될 수 있도록 자신의 예술적 행위를 통해 ‘정당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정호의 작품은 왜 중요한가? 그의 작품들은 추(醜)를 통해 거꾸로 삶의 본질을 일깨워준다는 데 있다. 이 역설은 마치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의 단편소설 『비곗덩어리』(1880)에 등장하는 매춘부의 경우처럼 겉보기에 비천한 존재가 오히려 인생의 진리를 잘 전달해 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가식을 벗고 삶의 근원에 다가가도록 안내하는 것은 겉보기에 아름다운 장식이나 화려가 아니라, 인생의 가면 밑에 잠재해 있는 보다 본질적이며 인간다운 본성을 일깨워주는 작품을 통해서인 것이다. 나는 이정호가 사물이 지닌 고유의 생생한 물성과 물질감의 표출을 통해 예술의 이 고유한 순기능을 아주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Ⅳ.
일찍이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아름다움(美)은 쓰레기장에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시대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 1864-1945)의 말처럼, 고흐의 시대에는 오브제나 설치미술의 관례(convention)가 없었다. 주지하듯이 오브제와 설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엽 다다(Dada)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고흐는 자기가 살던 시대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뒤섞여 존재하는 쓰레기장에서 어떤 미적인 요소를 발견했던 것이다. 비록 그에 대한 실천은 후대에 이루어졌지만 그런 선진적인 의식은 지니고 있었다.

이정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미국에서 중등학교 과정과 대학(SAIC: School of Art Institute of Chicago), 대학원(Pratt Institute) 과정을 마치고 작품 활동을 하다 최근에 귀국을 했다. 따라서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오랜만에 모국에 돌아온 이정호가 자신의 존재를 미술계에 알리는 일종의 신고식인 셈이다. 이정호는 오랜 외국 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여느 한국인과 똑같이 말하고 쓸 정도로 바른 언어교육을 받았다. 이는 매우 드문 일인데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 스타일과 달리 평소에는 예의범절에 바른 것 또한 그의 성격이 지닌 장점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정호는 작업노트 속에서 어렸을 때 한국에서 봤던 건설 현장의 추억을 언급한다.

“엔트로피, 이 자연계의 만물은 지속적으로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무질서가 바로 내 작업의 원동력이 되는 주제이다. 어린 시절, 서울에는 한창 건설 붐이 일었는데 나는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며 살다시피 했다. 공사현장에서 특히 혼돈과 질서가 공존하는 이런 곳에서 나는 아름다움과 영감을 발견하곤 했다......(중략)......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버려진 쓰레기 더미의 더러운 얼룩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이 발언은 오늘날 이정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특징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려준다. 특히 “버려진 쓰레기 더미의 더러운 얼룩”은 그 특징의 핵심이다. 이처럼 더럽고 비천한 것에 대한 개안(開眼)은 성장과정 동안 이정호의 내면에 잠복해 있다가 훗날 ‘구토’를 유발할 정도의 참혹한 형태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현재 우리가 보는 이정호의 작업은 마치 다양한 음식물이 위에 들어가 섞일 때의 신비스런 화학적 반응처럼, 극도로 예민한 예술가의 촉수가 다양한 재료들을 만나 빚어놓은 의식 작용의 결과물이다. 다음의 작업노트를 보도록 하자.

“작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캔버스에 있는 처음 몇 가지 흔적들을 나의 본능이 받아쓰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제의 미묘한 세부 사항을 신선하게 기억한다. 이런 직관적인 흔적들이 깔리면서 한 폭의 그림을 구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때로는 강조하고 때로는 지워가면서 층을 더 쌓아 올릴수록 그 표면은 점점 더 암시적이고 복잡해진다.”(이정호, 작업노트, 필자 일부 번안)

여기서 우리는 이정호의 작업이 예의 꼴라주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정호의 꼴라주 작품은 얼핏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수많은 ‘층들(layers)’로 이루어진 살들의 층위인 셈이다.
이정호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감정의 압력 게이지의 수치가 극한에 이를 정도로 압축을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유레카!‘를 외치며 작업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결과물인 작품을 전시장에서 보며 작가와의 소통과 공감을 시도한다. 이때 비로소 작가와 관객은 한 울타리 안에서 대화를 시도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 전시 서문 중 발췌-

■ 아티스트 이정호

1984 뉴욕 출생
2012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스쿨 순수미술전공 학사 졸업
2016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순수미술전공 석사 졸업
서울 및 뉴욕에서 거주하며 작업

개인전
2020 이정호: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학고재 디자인 | 프로젝트 스페이스, 서울
2019 부식의 추상 (쿠르시오 프로젝스 기획), 69 엘드리지, 뉴욕
2014 세상, 매체, 나, 필터, 갤러리마크, 서울

단체전
2019 겨울을 아직 기억하는가, 리히튼파이어, 뉴욕
추상의 경계, 리히튼파이어, 뉴욕
LIC 아트 오픈: 프로그레션, 더 팩토리 LIC, 뉴욕
2017 체리 밸리 여름 조각 트레일, 체리 밸리, 뉴욕
2014 쿠키 커터: 재정의된 현실들, 쿡 프로젝트, 뉴욕

수상
2017 2017 체리 밸리 조각 트레일, CV아트웍스, 체리 밸리, 뉴욕

레지던시
2018 장생포 아트스테이, 울산
2013 파리국제예술공동체, 파리

아티스트 이정호의 개인전 '나에게 보이는 흔적들 The Stains That I See'展은 9월 9일부터 9월 30일까지 종로구 팔판동 학고재 디자인·프로젝트 스페이스 한옥 전시공간에서 열린다. 마스크 착용은 필수.



김창만 기자 chang@asiaart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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